최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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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 
최면학 
위계이론 
구조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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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프로이드

출생에서 대학 졸업까지

 프로이드는 1856년 5월6 일에 지금의 체코슬라바키아의 모라비아에서 태어나서 3세 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Vienna) (독일어로 빈)로 이사를 와서 이후 독일 나치의 점령으로 그가 오스트리아를 떠나서 영국으로 망명을 할 때까지인 80세까지 그곳에서 살았다(Ellenberg, 1970).

 그는 학교 시절에 수재로써 이름이 났었고 그의 별명이 "책 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서적들을 섭렵했다. 이후에 그가 섹스피어를 비롯한 입센 등의 문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등의 다양한 이론들을 바탕으로 그의 정신분석학이 단단한 바탕에 설 수 있개된 것은 바로 그의 독서력 때문이었다고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그는 유태인으로 그가 처음에는 법대에 진학을 해서 정치가가 되려고 했으나 유태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 때문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고 밝히고 있다(Ellenberg, 1970).

 그가 진학을 했던 비엔나 의과대학은 그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최고 강대국으로써 그 당시 프랑스나 독일은 신생국가에 불가했다. 오스트리아의 브로본 왕조가 유럽 대륙을 점령하고 위세를 떨치는 오스트리아의 후반기 시절이었다. 이후에 세르비아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암살한 것이 원인이 되어 발발한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는 패전국이 되었고 그 후에 오스트리아는 두 개의 왕국인 오스트리아와 항가리로 분활 되었다. 이후에 제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지금은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작은 영세 중립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비엔나 의과 대학은 세계 최고의 대학이었다(Ellenberg, 1970).

 프로이드는 당시 5년 째였던 비엔나 의과대학에 3년을 더 다니고 졸업을 했다. 5년 째 의과대학에서 8년을 공부한 셈이었다.이유는 부케(Bruche) 해부학 연구소에서 연구 조교로 3년을 연구생활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의과 대학 시절에 같은 유태인으로 프로이드보다 3세 -4세 정도 선배인 블루러(Breuer)가 독일어로는 브로이어가 자신이 해부학 연구 조교로 있다가 프로이드를 그 자리에 소개를 해주고 떠났다. 이 브로이어는 이후에 프로이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드는 선배인 브로이어를 새로운 지식에 눈을 뜨게해준 스승으로, 자신을 도와준 선배로, 같이 책을 공동작으로 출판한 친구로써 표현을 하고 있다. 브로이어의 영향으로 이후에 그는 대학에서 자신이 전공한 신경과 의사로써는 정작 자신의 환자를 한 사람도 치료하지 못하고 심리학자로 변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Ellenberg, 1970).

 비엔나 의과 대학을 8년 만에 졸업한 프로이드는 해부학에 자신 만만했다. 의사로써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개업 준비를 했다. 다른 동료들보다 3년을 더 해부학에 전념했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 분야인 신경학에 전문가로써 자신있게 개업을 할 수 있었다(Ellenberg, 1970).

 

대학 졸업 후 개업 의사까지

 새 내기 의사로써 프로이드는 개업을 했으나 환자가 없었다. 의사로써 출발은 했으나 새내기 의사로써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대학 선배인 브로이어를 찾아가게 되었다. 자신보다 몇 년 선배인 브로이어는 그 당시에 개업에 성공을 해서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의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브로이어에게 그는 자신이 치료하고 있던 환자를 한 사람 소개를 해 주었다(Ellenberg, 1970).

  이 환자가 가명으로 소개가 되고 있는 안나 오(Anna O)이다. 안나 오는 유태인 백만 장자의 딸로서 브로이어한데서 치료를 받고 있던 21세의 인텔리전트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5개 국어를 마음대로 하는 인텔리젠트한 여성으로 모국어인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이태리어, 히브류어를 유창하게 했다. 안나 오(Anna O)는 이후에 프로이드한데서 치료를 받고 나서 오스트리아에 여성운동가로써 여성들의 사회 복지 운동에 앞장서서 사회발전에 공헌한 공로로써 이후에 오스트리아의 기념 우표로 발간이 된 인물로 이후에 프로이드의 제자들에 의해서 실명이 밝혀진 베르다 파펜다인(Bertha Pappenheim)이다(Ellenberg, 1970).

  브로이어(Breuer)가 안나 오(Anna O)를 치료 하면서 안나 오(Anna O)가 브로이어가 그녀 자신의 고통을 말로써 표현하게 하는 것을 보고 대화 치료(talking cure)라는 말을 제안하면서 그 용어가 정신분석의 치료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고 또 그녀가 마음 속에 갇히 목졸린 감정을 토해내게 하는 것을 보고 "굴뚝 청소"와 같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후에 이 용어가 "마음의 정화"(abreaction)라는 용어로 사용되게 되었다(Ellenberg, 1970).

 안나 오(Anna O)는 여러 가지 증세들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가끔씩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명은 아니었다. 오늘날 스트레스를 받으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증세였다. 두 번째로는 한 번씩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모국어인 독일어를 하지 못하고 영어로 했다. 세 번째로는 오른쪽 손이 뱀으로 보이는 환각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오른쪽 손가락이 다섯 개의 뱀의 머리로 보이는 환각 증세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 정신분석학자들은 안나 오(Anna O)가 정신증에 가까운 환자라고 보고 있다. 네 번째로는 오른 쪽 손이 바늘로 찔러도 감각이 없는 마비 증세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다섯 번째로는 오렌지 주스를 제외하고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Ellenberg, 1970).

 이러한 증세들을 가진 안나 오(Anna O)를 환자로 받아들인 프로이드는 자신만만하게 환자를 치료하려고 했으나 생리적인 이상이 전혀 없는 환자였다. 엑스레이를 찍어도 생리적으로는 정상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8년 동안 의과 대학에서 공부한 지식이 무용지물이었다. 생리적 이상이 없는 환자를 어떻게 치료를 할지 속수무책이었다(Ellenberg, 1970).

 그 당시에 안나 오(Anna O)와 같은 환자들을 "히스테리아 환자" 즉 hysteria 환자라고 불렀다. 오늘 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스테리칼 한 여성"으로 사용하는 "히스테리칼"이란 용어와는 전혀 다른 용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히스테리아 질병에 대한 역사는 따로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는 다시 선배인 브로이어를 찾아갔다. 선배가 생리적인 이상이 없는 환자를 어떻게 지금까지 치료를 했는가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Ellenberg, 1970).

  브로이어는 프로이드에게 안나 오(Anna O)를 최면으로 치료를 했다고 했다. 프로이드는 처음들어보는 최면 치료에 매혹이 되었다. 최면 치료를 공부하기 위해서 그 당시 최면치료에 세계적인 권위자가 있는 프랑스로 1885년 10월 11일에 1년간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Ellenberg, 1970).

 

프랑스로 유학 시절

 그 당시에 최면학에 세계적인 권위자인 가르코트(Charcot), 프랑스어로 샤르코가 파리에 있었다. 왜 최면학이 프랑스가 세계적인 중심 위치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다음 문단에서 최면학의 등장에서 자세히 설명을 하기로 하겠다. 가르코트(Charcot)는 별명이 "히스테리아의 황제"였다. 4개 국어에 능통한(모국어인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태리어) 의사요 과학자요 예술가였다. 그는 신경과 의사로써 왕의 주치의였고 의과대학 내과 교수였고 그 당시에 유명 음악가들을 초빙해서 같이 연주는 하는 음악가었고 골동품을 수집하는 예술가였고 새로운 의학적 치료 실험을 가감하게 도입하는 과학자였다. 그 당시에 파리에 의과대학 교수 임명에 그의 입김이 작용해서 모두가 그의 제자들로 채워졌다. 그는 신경학의 권위자로써 근육파괴 질병을 규명해서 그 병의 이름이 가르코트 병(Charcot 병)으로 명명되었다. 해부학과 병리학에 탁월한 업적으로 폐와 신장 기능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Ellenberg, 1970).

 그는 36세의 나이에 국립 살페트리아(Salpetriere)에 병원에 원장으로 취임을 했다. 그가 인턴 때 근무한 병원이 바로 살페트리에(Salpetriere) 병원이었다. 그 당시 살페트리아(Salpetriere) 병원은 그가 병원장으로 취임하기 전에는 3,000-4,000명의 환자들을 수용하는 수용소였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거지, 부랑아, 히스테리아 여성 환자들로 채워져있었다.  이곳은 이름이 병원이었지 사실은 갈 곳이 없고 떠돌이들을 국가에서모아서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해 주고 겨우 얼마간의 약을 주는 간이 수용소였다(Ellenberg, 1970).

 이곳이 그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히스테리아(hysteria) 치료의 실험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이곳을 이름없는 병원에서 과학 실험의 장소로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었다. 취임하면서 그는 살페트리에(Salpetriere) 병원을 실험실, 교육실, 치료실로 구분을 했다. 그 당시 이러한 시도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해부학 교실, 병리학 박물관, 왜래한자 진료실 등을 만들었다. 그는 과학의 황제로써 부귀(富)와 명성을 함께 누린 사람으로 개인 박물관을 소유하고 있었고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세계 전역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Ellenberg, 1970).

 그는 세계적인 권위자답게 매주 화요일 낮에는 과학자, 정치가, 예술 가들 앞에서 직접 환자 치료 시범을 보여주었고 매주 금요일 아침에는 강의 시범과 최면학과 히스테리아 강의를 하고 제자들이 그의 강의 시범과 강연의 사진을 찍게 했다. 그의 강의는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이 되어 그의 사후에 15권의 저서로 출판되었다. 지금의 정신 의학 교과서에는 가르코트(Charcot)가 강의와 치료 시범을 보이는 사진이 실려있다.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프랑스가 자랑하는 두 사람의 과학자로써 가르코트와 파스테르가 있다. 그는 사망 후에 파리의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인물이 되었다(Ellenberg, 1970). 

 그가 직접 환자 치료 시범을 보이는 매주 화요일에는 전 세계에서 히스테리아의 새로운 치료 기법을 배우려는 학자들과 명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에 새내기 의사인 프로이드도 섞여 있었다. 이후에 프로이드는 귀국해서 가르코트(Charcot)를 자신의 스승으로 가르코트의 논문과 저서들을 독일어로 번역을 했다. 자신이 가르코트(Charcot)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가르코트(Charcot) 는 프로이드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미 그 당시에는 프로이드는 한 사람의 이름 없는 의사였지만 전 세계에서 유명 명사들이 모여들었던 살페트리에(Salpetriere)에는 명사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가르코트(Charcot)가 프로이드를 기억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Ellenberg, 1970).

 프랑스에는 최면학이 의과대학에 도입이 되어 치료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는 최면학파가 두 개 학파로 양분이 되어있었다. 가르코트(Charcot) 학파와 낸시 학파(Nancy)학파가 그것이다. 둘 다 학교(School)를 가지고 있었고 가르코트 학교(Charcot School)와 낸시 학교(Nancy School) 가 그것이다. 가르코트(Charcot)는 가르코트 학교(Charcot School)에서 자신의 계통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고. 낸시 학교(Nancy School)에서는 유명한 베른헤임(Bernheim)이라는 내과 교수이자 최면학자가 있었다. 베른헤임은 의과대학 내과 교수로 낸시(Nancy)라는 지역에 라보(Liebeault))라는 바보 같은 괴짜 의사가 치료 비용을 받지 않고 이상한 치료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바보 의사(무료 치료)가 이상한 치료를 한다(최면 치료)는 소문에 그 의사를 찾아가게 되었고 그가 최면이라는 치료법을 사용하는 것을 알 게 되어 이것에 심취하게 되어 최면을 의과 대학에 소개를 하고 직접 대학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의학계에 보고를 하고 최면학 교과서를 쓰게 되었다(Ellenberg, 1970).

 이후에 가르코트(Charcot)와 베른헤임(Bernhem)은 최면에 대한 사소한 의견 충돌로 갈라서게 되었다. 가르코트(Charcot)는 최면 치료 시범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최면을 걸어서 팔에 감각이 없도록 제시를 하고 최면에 깨어났을 때 실제로 팔에 감각이 없는 것을 보여주면서 히스테리아와 최면은 같은 것으로 즉 hyteria=hypnotism으로 보았고 베른헤임은 히스테리아는 질병이고 최면학은 제시에 의한 의식의 변형이지 질병이 아니라는 주장 즉 hysteria=/=hypnotism에 서로 등을 돌린 것이었다. 이후에 최면학은 베른헤임(Berhem)의 설명이 옳다는 것이 가르코트(Charcot)의 사후에 제자인 바빈스키(Babinsky)의 연구에 의해서 최면은 설득에 의해서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최면은 제시의 결과임이 밝혀지게 되었다(Ellenberg, 1970).

 프로이드는 가르코트(Charcot)가 제자들을 시켜서 병원에 입원 중인 발짝 증세를 보이는 히스테리아 여성 환자를 데리고 오게 했다. 그 당시에 히스테리아 환자는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그 이후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발짝 증세를 보이는 여성 히스테리아 환자를 제자들이 부축해서 가르코트 앞으로 데리고 왔다. 치료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명사들이 모인 앞에서 가르코트가 환자에게 최면을 걸었다. 프로이드는 최면에 걸린 환자와 가르코트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다. 환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근친 상간이나 강간을 당하거나 자신이 폭력을 당한 상처들을 이야기하면서 통곡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최면 치료가 종료되면서 가르코트(Charcot)는 환자를 최면상태에서 깨어나게 했다. 최면에서 깨어난 환자는 최면 치료 이전의 발짝 증세가 사라져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와있었다. 또한 최면에서 깨어난 환자는 가르코트와 지금까지 최면 상태에서 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 물었을 때 환자는 조금 전에 최면 상태에서 한 이야기들을 환자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프로이드는 최면에서는 어린 시절의 상처나 과거의 일들을 기억을 하면서도 깨어나서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경험들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고 망각으로 기억 속에서 사라져서 기억이 지워진 것이 아니다라는 무의식 이론이 이후에 탄생하게 된다. 이후에 프로이드는 사람이 기억을 할 수 없는 기억들은 대부분이 상처 기억들로써 이 기억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데서 무의식속으로 억압되어진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게 되면서 정신분석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Ellenberg, 1970).

 그는 가르코트(Charcot)의 최면에 걸린 히스테리아 환자들의 어린 시절의 근친 상간, 강간, 폭력 등의 심리적 상처들이 히스테리아의 밑바닥에서 작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가르코트(Charcot)는 히스테리아(hysteria)는 심리적 원인이다 라는 것을 밝혀냈고 프로이드가 이것을 물리, 화학적인 과학적인 설명으로 풀어내어 설명을 하게 된 것이 정신분석학의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 고로 정신분석의 핵심이 섹스 심리 즉 psycho-sexual 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에 프로이드는 섹스 심리의 발달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구순기 단계(oral stage), 항문기 단계(anal stage), 남근기 단계(오디팔 단계)(odepal stage, phallic stage), 성기기 단계(genital stage)로 분류해서 섹스 심리 발달의 단계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Ellenberg,1970).

 

최면학의 등장

 최면학의 등장은 가르코트(Charcot) 등장 이전에 100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775년 1월에 신부이자 성공적인 귀신을 쫓아내는 캐토릭의 굿을 하는 엑소시스트인(exorcist) 가스너(Gassner)가 대중들 앞에서 귀신들린 환자들을 치료하는 시범을 보이면서 오스트리아 전국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터나 빈 공터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귀신에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귀신들려 발짝을 하는 사람들을 붙잡게 하고 가스너(Gassner)가 신부 복장을 하고 십자가와 성경책을 손에 들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다가가서 "귀신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네가 몸에서 빠져 나가지 않으면 이 십자가와 성경책으로 너를 불태워죽이겠다"라고 하면서 성경책과 십자가를 귀신들린 사람의 몸에 갖다대면 귀신들린 사람은 발짝을 하고 몸을 비틀고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동안 그렇게 발짝으로 경련을 일으키던 환자는 붙잡고 있는 장정들을 뿌리치료 털털 털면서 일어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어가는 것을 군중들이 보면서 가스너(Gassner)의 이름은 전국으로 유명하게 되어 귀신들린 사람들이 몰려들 게 되었다. 가스너(Gassner)는 전국으로 순회를 하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이러한 귀신 쫓는 굿 즉 exorcism을 하고 다녔다(Ellenberg, 1970).

 그 당시는 18세기 개몽주의 시대로 처음으로 공립 학교가 등장하고 교육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과거에 귀족들이나 왕족들을 자제들을 유명한 이름난 학자들을 집에 모셔와서 개인교수를 시키던 튜터(tutor) 제도가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오면서 교회에서 아동들을 모아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기 된 것이 공립 학교의 시작이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눈에 보이면 믿는다는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가스너(Gassner)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시범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진짜 귀신이 몸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Ellenberg, 1970).

 캐토릭 교구장은 가느너(Gassner)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가스너(Gassner)가 신부의 본업을 잊어 버리고 귀신든 사람을 고쳐주며 순회를 한다는 것에 실제로 귀신든 환자를 치료를 하는지 진상 조사위원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청문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진상 조사 위원 중에 한 사람인 메즈머(Mesmer)가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다. 메즈머(Mesmer)는 가느너(Gassner)가 귀신들린 환자에게 귀신을 쫓는 시범을 보게 되었고 그는 진상 조사 위원회 앞에서 가스너(Gassner)가 신부 복장을 하고 십자가와 성경책을 들고 하는 것을 내 손가락 하나로써 할 수 있다고 공언을 했다. 그는 진상 조사 위원회 앞에서 손가락 하나로써 귀신들린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오게 하고 가게 하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마음대로 컨트롤했다. 마치 자석에 끌리는 사람처럼 귀신들린 사람은 메즈머(Mesmer)에게 끌려오고 밀려가고 메즈머의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대로 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서 메즈머(Mesmer)의 최면학이 등장하게 된다. 가느너(Gassner)는 진상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를 근거로 케토릭 교구장의 지시를 받아서 exorcism의 활동의 중지 명령을 받았고 해고 되어 조그만 교구 내로 추방이 되었다. 엄격한 로마 교회의 의식에 의해서먼 교인들만을 상대로 실지하도록 명열을 받았다(Ellenberg, 1970).

 가스너(Gassner)의 시대가 물러나고 메즈머(Mesmer)의 시대가 열기게 되었다. 메즈머(Mesmer)는 프로이드보다 약 100년 먼저 테어난 사람으로 1734년 5월 23일에 독일의 코스탄스(Costance)에서 출생했다. 그는 신학을 공부했다가 그만 두고 철학을 전공했다가 법학으로 바꾸었고 30대가 넘어서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33세 때 비엔나(Vienna)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사람이었다. 부유한 귀족 미망인과 결혼 후에 하으든, 모짤트 등이 자신의 집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한 의사가 자석으로 병을 치료 한다는 논문을 보고 이런 분야를 공부하게 되었고 졸업 논문이 병에 대한 우주의 영향력이었다. 27세의 발짝성 처녀를 치료하는데 자석을 3개를 몸에 붙여서 치료를 한 후에 회복 시켜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다. 그는 유명 의사에 의해서 치료가 되지 않았던 항가리 귀족의 발작성 치료후 회복이 되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책으로 출판했다. 이것이 동물 자장 이론 즉 이었다. 건강한 사람의 몸에는 건강한 유체가 흘러다니고 병든 사람들은 몸의 유체가 병들었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의 유체를 병이든 사람의 몸으로 흘러가게 한다는 이론이었다. 그 당시에는 과학의 등장으로 자석이론, 전기 이론, 자장 이론 등에 연결시켜서 그의 이론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전국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전국에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직접 환자 치료의 시범을 군중들에게 보여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잠에 환자가 취하는 것을 보게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증세를 꺼집어냈다. 목소리를 잃은 여성 환자가 메즈머가 손가락으로 몸을 만지자 목소리를 회복했다. 손을 갖대대면 증세가 나타나고 손을 떼면 증세가 사라졌다. 옆에 거거나 멀리 있으면 증세가 변했다. 메즈머(Mesmer) 옆에 가면 자석에 끌리듯이 어떤 힘(유체)에 의해서 환자들이 영향을 받는다. 메즈머(Mesmer)의 힘은 자식에 의해서 강화된다는 이론으로 그의 이론은 뉴톤의 만유인력에 버금가는 새로운 이론을 발견했다고 선전을 했다. 그는 그의 이론을 동물 자장이론 혹은 유체이론으로 명명했다(Ellenberg, 1970).

 메즈머(Mesmer)의 유체 이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잠에 환자가 취한다. 논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증세를 꺼집어낸다. 목소리를 잃은 여인 환자가 몸을 만지자 목소리를 회복했다. 손을 갖다대면 증세가 나타나고 손을 떼면 증세가 사라진다. 옆에 가거나 밀리 있으면 증세가 변화된다. 메즈머(Mesmer) 옆에 가면 자석에 끌리듯이 어떤 힘(유체)에 의해서 홙들이 영향을 받는다. 메즈머(Mesmer)의 힘은 자석에 의해서 강화된다고 증인들이 증언을 한다. 유체가 우주, 지구, 천체 사이에 흐른다. 질병은 인간이 몸뚱이의 유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어떤 도구의 도움으로 유체가 균형을 가져와 병이 치료 된다. 건강한 사람은 유에가 많아서 유체가 적은 병든 사람에게로 흘러 보내어 병을 회복시킨다. 유체의 극대화를 위해서 크다란 둥근 금속 반원형인 바쿠(Baque)을 만들어 그곳에 유체를 저장하고 막대기인 라포(Rapport)로서 유체를 전달한다. 이 금속 막대는 이후에 유체가 실제로 몸에서 몸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금속 막대기라는 이름인 라포(rapport)는 초반기 최면학에서 환자와 최면 치료사 사이에 심리적 관계라는 용어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환자와 분석가 사이에 라포(rapport)가 형성된다는 말을 사용해 오다가 최면학의 용어를 버리고 지금은 치료 동맹(therapeutic alliance)으로 작업 동맹(working alliance)으로 바뀌었으나 상담학에서는 지금도 환자와 상담자 사이에 라포(rapport)가 형성된다 즉 심리적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Ellenberg, 1970).

 인간의 역사에서 자신이 스스로 위대한 발견을 하고도 그것을 모르고 죽은 두 명의 사람이 있는 바 한 사람은 콜롬버스이고 또 한 사람은 메즈머였다. 콜롬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서(西) 인도라고만 알았다. 그 대륙이 신 대륙이라는 것을 모르고 죽었다. 메즈머(Mesmer)는 자신이 스스로 새로운 위대한 발견을 하고도 그것이 최면학임을 모르고 죽었다(Ellenberg, 1970).

 메즈머(Mesmer)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뉴톤의 만유인력에 버금가는 위대한 발견이라고 선전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발견을 너무 과신한 것이 탈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전국에서 동물 자장 이론 즉 유체 이론으로 들끓게 되자 오스트리아의 황녀인 마리아 테레사(중국의 서태후처럼 섭정을 한 여왕)의 시종인 18세의 장님 소녀의 치료를 해 달라고 왕가의 초빙을 받게 되었다. 그 소녀는 3세 때 장님이 되었고 황녀의 시종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였다. 메즈머(Mesmer)는 그 장님 소녀에게 최면을 시도했고 처음에는 그 소녀가 눈이는 것 같다고 했으나 그 다음 날에 눈을 뜬 것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메즈머(Mesmer)의 인기는 엉터리로 폭락을 했다. 메즈머(Mesmer)는 43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 당시 프랑스는 혼란기로 사회적 불안이 팽배했다. 미국의 독립전쟁의 열기가 뜨거웠고 영국과 전쟁에서 패배해서 인도와 캐나다를 상실했었다. 집단 히스테리가 휩쓸었다. 메즈머(Mesmer)가 프랑스 왕의 동생 주치의인 델슨(Deslon)과 친교로 델슨이 메즈머의 제자가 되었다. 군중들 앞에서 히스테리아 환자의 시범 치료를 보이면서 프랑스 전국에 선풍을 일으켰다. 온 프랑스 사회가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유체 저장 막대기로 라포(rapport)를 사용하고 라이덴 병의 축전기 이론을 응용해서 바코(Baquet)라는 금속 반원형을 만들어 유체 저장고로 사용했다. 프랑스 전국에서 모여드는 환자들을 치료를 하기 위해서 반원형의 금속체를 만들고 그 둘레를 약 200명이 둘러 싸고 치료를 하는 역사상 최초로 집단 치료를 실행했다(Ellenberg, 1970).

 그는 그 당시의 등장했던 전기 자기 이론을 도입해서 자신의 유체 이론을 정당화 했다. 증세를 표면화 시켜서 발짝 증세를 일으키게 해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어 긴장을 방출시킨 치료를 사용했음을 이후에 프로이드에 의해서 밝혀졌다. 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석물을 이용해서 무릎을 꿇고 환자와 무릎을 맞대고 엄마 손가락을 눌러서 환자가 그 감각을 느끼고 발짝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Ellenberg, 1970).

 델슨(Deslon)이 메즈머의 방법을 도용해서 자신이 개업을 하고 환자를 치료하자 메즈머는 델슨을 비난했다. 메즈머(Mesmer)의 자장 이론을 판권으로 사겠다고 변호사, 의사, 과학자들이 나서게 되었다. 메즈머(Mesmer)는 자신의 치료 이론을 제자들에게 비밀로 하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제자 양성을 소홀히 한 것이었다(Ellenberg, 1970).

 프랑스 전역을 휩쓰는 메즈머(Mesmer)의 열풍은 1784년에 드디어 과학학회와 의학학회가 공동으로 진상 조사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 공동 조사 위원회에는 화학자인 라보아제, 과학자인 프랭클린(피뢰침을 발견한 미국의 과학자로 그 당시 미국 대사로 근무), 의사 킬로틴(사형틀인 단두 대를 만든 사람) 등이 섞여 있었고 진상 조사위원회의 목적은 정말로 만유인력에 버금가는 새로운 유체를 발견했나?에 집중이 되었다. 메즈머(Mesmer)가 직접 대면을 거부했기 때문에 진상조사 위원회는 델슨(Deslon)에게 가서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발표된 백서에는 환자와 치료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체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환자는 치유가 되는 것은 확실하다, 여자 환자와 남자 치료사 사이에 위험이 존재한다 등을 발표했다. 메즈머(Mesmer)의 새로운 유체 발견은 거짓으로 들어나고 그의 인기는 폭락을 했다. 그는 1785년 실망해서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에는 이름없는 사람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Ellenberg, 1970).

 역사는 메즈머(Mesmer)를 계몽주의가 낳은 시대적 산물로 보고 있다. 무지, 미신, 맹목적 믿음, 악령에 대한 이성의 승리로 본다. 귀신, 악령, 마귀, 마녀로 보았던 시각을 병이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치료기법을 고안한 공로는 인정하고 있다. 증기 기관, 전이 이론 등을 통해서 자석, 전기의 흐름, 동물 자장 등 과학적 개념의 사용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정신 이상자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치료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지역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메즈머주의는(Mesmerism) 는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는 가스너(Gassnerism)주의에 대한 승리로 본다(Ellenberg, 1970).

 메즈머(Mesmer)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을 했지만 그가 남긴 자료들은 제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귀족이었던 기병 장교 퓨이세이그(Puysegur)가 23세인 자신의 부하 빅토르(Victor)가 군대 훈련 도중에 발짝 증세를 보이는 것을 보고 그가 메즈머의 치료 방식을 사용해서 잠자는 상태와 유사한 상태로 만든 다음에  즉 최면에 걸린 다음에 자신의 누나와 갈등을 이야기하면서 누나와 갈등을 해결하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을 한 후에 최면에서 깨어나서 자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에서 연구를 계속해게 되었다. 잠자는 것과 유사한 상태에서 깨어있는 것보다 맑은 정신으로 질문과 대답을 하는 것에 흥미를 가진 퓨이세이그(Puysegur)는 여러 사람에게 똑 같은 실험을 실시해서 같은 현상을 찾아냈다. 그는 이 잠자는 상황과 유사한 상황이지만 실제 잠자는 것과 다른 상황을 인공 잠(artificial sleeping)으로 명명하고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큰 느티나무 밑에 약수터 둘레에 공종 치료장을 만들고 나무에 밧줄을 매고 환자들이 손에 손을 잡게 하고 유체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이 흐름으로 발짝을 유도해 냈다. 한 달에 약 300명의 치료에서 60여 명이 치료가 되었다.1785년 퓨이세이그(Puysegur)는 빅토르(Victor)를 데리고 파리에가서 과학학회에 연구를 보고 했다. 빅토르가 그 사실을 알고 잠자는 상태에서 "나를 실험 대상으로 하면 나쁘다"라고 실험대상으로 부적당했음을 지적했다. 퓨이세이그(Puysegur)가 200여명의 제자 육성과 이론 연구서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인공 잠과 심리 이론을 발전 시키기 위해서 학회를 조직하고 연구 보고서를 내고 이론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속 연구되고 발전되어 프랑스가 최면학에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에 가르코트(Charcot)와 베른헤임(Bernheim)을 탄생시키게 되어 의과대학에서 치료로 사용되어지게 된 것이었다(Ellenberg, 1970).

 이후에 인공 잠(artificial sleeping)이라는 용어는 영국인 의사가 최면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실제로 잠자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최면학 즉 hypnotism으로 고쳤다. Hypo는 그리스어로 잠의 여신에서 따온 말이다. 최면학은 hypnotism으로 최면 즉 hypnosis는  히스테리아(hysteria)와 같은 병이 아니고 제시(suggestion)에 의해서 생긴 의식의 변형된 상태라는 것이 밝혀졌다. 가르코트와 베른헤임 등에 의해서 신경과 관계있는 질병으로 치료가 확대 되었다. 신경통, 위장병, 생리불순,  생리적인 병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최면학(hypnotism)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제시에 의해서 얻어지게 된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지게 되었다(Ellenberg, 1970).

최면학에서 정신분석 탄생까지

다시 프로이드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프로이드는 가르코트(Charcot) 한데서 최면학을 공부해서 1년 후에 비엔나(Vienna)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비엔나에서 히스테리아(hysteria)환자들을 치료 하면서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최면학은 결국 온전한 치료기법이 아니고 반쪽 치료기법임을 깨닫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 기법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889년에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서 낸시 학교(Nancy School)를 방문하게 된다. 낸시 학교에는 그 당시 가르코트와 쌍벽을 이루는 베른헤임이 있었다. 프로이드는 베른헤임이 히스테리아 환자에게 최면을 걸고 치료를 한 다음에 최면에서 깨어나서 환자에게 조용해 기억을 할 수 있으니 기억을 해보라고 유도를 했다. 환자는 최면에서 했던 내용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프로이드가 이것을 보고 최면에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기억으로 회상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최면에 걸리지 않는 환자들을 위해서 기억을 회상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하기로 했다. 먼저 환자를 편안하게 카우치에 눕게 하고 손으로 이마를 만지면서 기억이 날 것입니다라고 제시를 했다. 환자를 안정 시키고 프로이드는 환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 의자에 앉아서 환자가 머리 속에 뜨오르는 생각, 느낌, 상상, 지각 등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하게 했다. 그는 환자가 하는 말들을 노트를 하면서 환자가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방법이 바로 정신분석의 탄생이 된 것이다. 프로이가 사용한 편안한 카우치가 환자의 치료에서 사용되게 되었고 프로이드가 사용한 기억 회상 기법은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으로 자유롭게 끊어진 기억들을 연결 시켜서 기억을 회복하는 방법이 된 것이다. 1895년에 프로이드가 치료한 5명의 히스테리아 환자와 브로이어가 최면으로 치료한 2명의 환자를 치료 내용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히스테리아 연구"(study on Hysteria)가 공동작으로 출판 되었다. 여기에서 프로이드가 치료한 5명의 환자들 중에 3명은 최면에 걸리지 않아서 프로이드가 고안한 방법으로 치료를 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탄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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